📖 혼란의 시대 < 나를 잡아주는 문학 세 권 > 3. 『페스트』 – 고립된 도시, 드러나는 인간의 얼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재난 소설을 만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죽음의 그림자’가 한 도시를 덮을 때, 인간이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철학적 성찰이자, 우리 삶의 본질을 되묻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단순히 전염병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읽고 나니, 『페스트』는 질병 그 자체보다도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책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소설의 무대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작은 도시 오랑입니다. 어느 날 수많은 쥐들이 나타나 죽어가고, 곧이어 사람들에게도 정체 모를 병이 번지면서 도시는 봉쇄됩니다. 바깥과 단절된 채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시민들의 삶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각자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절망 속에서 무기력해지고, 누군가는 신앙으로, 또 다른 이는 과학과 연대로 이 재난을 버텨내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취약하면서도 동시에 강인할 수 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 세계를 흔든 코로나 팬데믹은 『페스트』 속 오랑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질병이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도시는 봉쇄되며, 사람들은 서로의 거리를 두어야 했던 시간들.
책 속 인물들이 겪는 고립과 두려움은 몇 년 전 우리가 피부로 경험했던 감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페스트』는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질문을 던지는 책처럼 다가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리외 의사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태도에서 저는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거창한 구호나 극적인 희생이 아니라,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태도야말로 진짜 용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 속의 연대’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세상이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더라도, 우리를 붙드는 것은 결국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버티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겸허함’이었습니다. 재난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무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무력함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페스트』는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한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평범함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힘이라는 것을, 저는 이 소설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크고 작은 ‘페스트’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질병일 수도 있고, 사회적 불의일 수도 있으며,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깊은 상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카뮈는 말합니다. 페스트는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또다시 다른 형태로 돌아오리라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의 사람을 지키고, 나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것. 그것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것입니다.
『페스트』는 결국 죽음의 그림자를 이야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삶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말하는 책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고립될 수 있고, 무너질 수 있으며, 다시 또 고통의 시대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속에서도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손길과 작은 책임입니다.
저는 『페스트』를 읽으며,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믿고 싶어졌습니다. 희망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리외 의사가 보여준 것처럼,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곧 희망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