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불현듯, 한 문장이 내 마음 한가운데를 정확히 겨냥해 들어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듯한, 혹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생각을 단숨에 드러내는 듯한 그런 문장 말이죠.
그때 우리는 책을 덮지 않고, 펜을 듭니다. 그 문장을 손으로 옮겨 적으며 나의 감정을 정리하고, 그 순간의 울림을 영원히 붙잡아두기 위해서입니다. 필사는 단순히 ‘글씨를 옮겨 적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서 울린 목소리를 더 오래,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 됩니다. 오늘은 읽는 순간에도 좋지만, 필사했을 때 더 오래 남는 문장이 가득한 책 세 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김이나 작가의 『보통의 언어들』.
수많은 대중가요의 가사를 써온 작사가 김이나는, 단어의 결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다루는 사람입니다. 이 책은 ‘말’이라는, 우리가 매일 쓰지만 종종 가볍게 흘려보내는 도구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그녀는 말의 온도, 말이 사람 사이에 남기는 흔적, 그리고 말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식에 대해 담담히 적어 내려갑니다. 책 속에는 “누군가의 말이 오늘 하루를 바꾸는 순간”과 같은 짧지만 강렬한 문장이 많습니다. 필사하며 나만의 ‘언어 사전’을 만드는 기분이 드는 책입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 그 말의 형태를 찾아주는 안내서가 되어줍니다.
두 번째,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이 책은 출간 이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필사 노트에 자리를 차지해 온, ‘문장 수집의 보고(寶庫)’ 같은 작품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따뜻한 말에 얼마나 쉽게 녹는지 모른다”라는 구절처럼, 단순하지만 곱씹을수록 깊어지는 문장들이 페이지마다 숨어 있습니다. 필사는 여기서 한 문장을 고르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짧은 문장을 옮기는 그 몇 분 동안, 우리는 언어의 힘과 무게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혹은 마무리하며 필사한 한 줄이 의외의 위로가 되어 다가오는 책입니다. 특히 글쓰기 습관을 만들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하루 한 줄 필사’의 재료로 삼아보길 권합니다.
세 번째, 정여울 작가의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겉으로는 여행 에세이지만, 그 속에는 삶과 문학,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파리, 프라하, 로마 같은 도시들의 풍경 속에서 작가가 마주한 문학 작품과의 만남,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린 마음의 기록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어집니다. 이를테면 “길을 걷다가 문득, 이 도시가 내 마음속 한 문장과 닮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같은 표현은 여행 경험이 없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한껏 자극합니다. 필사하며 느끼는 건, 단순한 여행의 설렘이 아니라, 삶 속에 스며든 문학적 순간들입니다. 문장을 옮기다 보면 마치 그 도시의 바람과 공기를 함께 적어내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필사가 주는 힘은, 단순히 좋은 문장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장을 내 삶 속에서 ‘활용’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한 번 옮겨 적은 문장은 자연스럽게 내 말과 글 속에 스며들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작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필사 노트를 들춰보면, 그때그때 나를 움직였던 감정과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마치 지난 시절의 나와 대화를 나누는 기분입니다.
오늘 소개한 세 권의 책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필사를 통해 두 번, 세 번 곱씹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은 한 번 읽고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펜 끝으로 옮겨 적고, 나의 문장으로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책을 ‘내 책’으로 만들게 됩니다. 당신의 손이 기억하는 문장은, 앞으로도 오래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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